[시선2035] 사라진 덕담 “부자 되세요”

정진호 경제부 기자
2001년 말 눈 쌓인 설원에서 배우 김정은이 “여러분”을 찾는다. 큰소리로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뒤 눈사람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한 카드사의 광고는 2002년부터 가장 많이 하는 새해 덕담 중 하나였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2021년 가수 츄(김지우)가 이 광고를 오마주 했지만,시선사라진덕담부자되세요월 주식 시장 그다지 관심받지 못했다. 더는 “부자 되시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는 때다.
지난달 29일 현대차 기술직(생산직) 채용의 서류전형 결과가 발표됐다. 지원자 본인의 서류 합격 여부 확인 날임에도 접속 지연이 몇 시간 동안 이어질 정도로 관심이 컸다. 서류전형 발표 이후 회원 수 320만 명의 취업 커뮤니티 ‘독취사’에 서류합격자 100명의 스펙을 정리한 글이 올라왔는데 합격자 절반가량이 자격증만 5개 이상이었다.
![배우 김정은이 2001년 12월 유행한 카드사 광고에 출연해 “여러분, 부자 되세요”를 외치고 있다. [유튜브 캡처]](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304/03/530bb8fa-e3de-4668-8cd7-7757e6161956.jpg)
배우 김정은이 2001년 12월 유행한 카드사 광고에 출연해 “여러분, 부자 되세요”를 외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주변만 둘러봐도 10여 명의 지인이 지원했지만, 서류 합격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원자 중엔 다른 대기업·중견기업의 개발자나 연구원도 있다. 현대차는 지원자 수와 경쟁률을 공개하지 않지만, 400명을 뽑는 이번 전형에 지원자가 18만 명이 몰렸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킹산직’(왕+생산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잘 다린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일, 이른바 ‘화이트칼라’는 더는 선망의 대상이나 모두의 목표 같은 게 아니다.
현대차 생산직이 킹(왕)이라 불리는 건 ‘워라밸’ 때문이다. 교대근무긴 하지만, 자정부터 아침까진 라인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루 근무시간은 8시간 정도로 고정돼 야근 개념이 없다. 공휴일엔 쉰다. 이처럼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게 절대다수 직장인의 최대 목표가 됐다. 챗GPT에 이용자들이 열광하는 것도 적은 시간을 투입해 많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투입 시간 대비 효율성, 근무시간 대비 보수가 핵심이다.
어느 날부터 빈번하게 주고받는 인사는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다. “부자 되세요”가 지키던 많이 쓰는 덕담의 자리를 꿰찼다. 최근 주 69시간 논란이 건드린 ‘역린’이 이 지점이다. 매일 야근하고, 주말까지 출근해서 더 많은 보수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더는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다.
정부는 억울해한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정확한 표현은 주69시간이 아니고 ‘주 평균 52시간’이 맞다”고 해명했다. 주69시간은 극단적인 경우고, 만일 그만큼 일했다면 추가 근무를 휴가로 보상받아 주3일 근무도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일견 합리적이지만, 법으로 강제해서라도 오래 일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게 근로자의 요구다. 인정해야 한다. 시대정신은 “부자 되세요”에서 “적게 일하고”로 바뀌었다. 그리고 하나 더. 주69시간과 주52시간만 언급되다 보니 종종 잊게 되는데, 법정 근로시간은 원래 주40시간이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